#1. 고교생 A양은 지난해 스마트폰으로 랜덤채팅 앱을 다운 받은 뒤 ‘나락’으로 떨어졌다. 앱을 다운받는 데에는 어떤 절차도 필요치 않았다. 간단한 프로필을 작성하자마자 이른바 ‘조건 만남’ 요구가 쏟아졌다. 대학 학생증을 보여주며 “술과 밥을 사주겠다”는 한 남성의 말에 A양은 호기심 반으로 실제 만남을 가졌다가 ‘덫’에 걸렸다. A양은 “학교와 친구에 알리겠다”는 협박에 수차례 성폭행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2. B(23)씨는 지난해 3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만난 가출 청소년 C(16)양을 꼬드겨 돈벌이에 나섰다. B씨는 “돈이 떨어졌다”며 C양에게 성매매를 강요했다. C양은 채팅 앱으로 물색한 남성들과 성매매를 해야했고, 대금 310만원은 모두 B씨의 손아귀로 떨어졌다. 그는 심지어 C양이 한 PC방 종업원과 웃으며 인사를 했다는 이유로 수차례 뺨을 때리기도 했다.
청소년들의 성매매, 음란행위를 조장하는 채팅 앱의 폐해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정부는 그간 ‘특단의 대책을 내놓겠다’고 여러번 공언했지만 여지껏 부처 간 ‘떠밀기’가 계속되면서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가 청소년 성매매 실태를 알면서도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성매매 청소년 60% 앱 통해 만나”
29일 경찰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우선 채팅 앱을 통해 성매매가 활발히 이뤄지는 것은 ‘안전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대부분의 앱이 특별한 본인 인증 절차나 성인 인증 없이 닉네임과 나이만을 요구하고 있고, 대화 내용도 필요에 따라 즉각 삭제된다.
지난해 5월 현직 경찰관이 근무 시간에 채팅 앱을 통해 만난 여고생과 성매매를 하다 적발된 사례는 남성들 사이에 이런 인식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지 엿볼 수 있다. 경찰관마저 손댈 정도로 ‘흔적을 안 남긴다’는 인식이 강하다는 거다.
‘청소년 포주’들도 채팅 앱을 기반으로 전국적으로 활개를 치고 있다. 지난해 경남 통영에서는 10대 청소년 4명이 지적장애 여중생을 여관에 가둔 뒤 채팅 앱을 통해 수십차례 성매매를 시켰다가 경찰에 적발됐다. 올초 충주와 인천에서도 10대 청소년들이 여중생을 감금시키며 성매매를 시킨 뒤 돈을 빼앗은 사건이 발생해 논란이 컸다.
여성가족부의 ‘청소년 성매매 실태조사’(2016)에 따르면 조건만남을 경험한 청소년들은 채팅 앱(37.4%)과 랜덤채팅 앱(23.4%), 채팅사이트(14%) 등을 통해 상대방을 만난 것으로 조사됐다. 이중 65.4%가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호소했고, 48.6%가 임신 또는 성병 등의 피해를 겪었다.
◆부처간 떠밀기에 ‘제자리 걸음’만
문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지난 2016년 1월 ‘채팅 앱을 이용한 성범죄에 적극 대응하겠다’고 밝혔지만 여지껏 뾰족한 대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채팅 앱 규제는 개인 간 대화에 대한 규제 근거가 마땅치 않은 데다 이를 주도적으로 이끌 주체가 모호해 유관 부처 간 ‘떠밀기’만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일단 앱의 등급을 매기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통신비밀보호법 등으로 인해 사적인 대화까지 규제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방심위 관계자는 “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를 오용하는 사람이 잘못”이라며 “청소년보호와 성매매 문제 등은 여가부 소관 업무”라고 선을 그었다.
반면 여가부는 심의는 기본적으로 방심위 업무란 입장이다. 지난 2016년 김희정 여가부 장관은 국정감사에서 “랜덤채팅 앱 관련 시정조치를 방심위에 요청했지만 문제 있다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청소년 유해물 지정이 어렵다”며 “방심위가 그런 결정을 하는 한 저희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런 기조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이후 지난해 4월 국무조정실 주재로 관계부처 실무회의가 있었으나 두 부처 간 시각 차이만 확인하고 흐지부지됐다고 한다. 당시 방심위는 여가부 측에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조항 중 ‘청소년에게 불건전한 교제를 조장할 우려가 있거나 이를 매개하는 것’이란 문구를 ‘청소년에게 불건전한 교제를 조장하거나 매개할 우려가 있는 것’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으나, 여가부 측에서 실효성에 의문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여가부 한 관계자는 “법 개정에는 무수한 절차와 행정력이 소요되는 일”이라며 “당시 회의에서 방심위에 ‘그럼 해당 조항을 바꾸면 심의를 해줄 것이냐’고 물었으나 별다른 대답을 내놓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규제 공백’ 틈타 성매매 암시 앱까지 등장
이런 모습을 두고 시민단체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청소년 성매매 문제의 심각성에 비춰 ‘소관 부처가 애매하다’란 이유만으로는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는 “수년째 똑같은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만 정부는 수수방관 중”이라며 “채팅 앱에서 성매매가 버젓이 이뤄지는 건 국민 누구나 알고 있는데 최소한 성인 인증이라도 강제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서울의 한 상담기관 관계자도 “성매매를 경험한 청소년들은 폭력과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며 “성인이 돼서도 극심한 자책감과 후유증에 시달리는 만큼 조치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대놓고 조건만남이나 음란행위를 암시하는 문구를 내건 채팅 앱까지 등장했다. 구글플레이스토어 등 앱 마켓들을 검색해 보면 ‘조건팅’, ‘원나잇톡’, ‘소라넷톡’ 등의 앱이 ‘17세 등급’으로 다수 올라와 있다. 17세 등급은 구글 등에서 자체적으로 매기는 등급일 뿐이어서 청소년도 이용이 가능하다.
구글 관계자는 “청소년이용불가 등급은 정부가 청소년 유해매체물로 지정하지 않는 한 등급을 임의로 분류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기사날짜: 18. 07. 29
출처: 세계일보
http://www.segye.com/newsView/20180729002706
